오크모스(oakmoss, 참나무이끼)는 향수에서 가장 깊고 어두운 초록빛 향 중 하나이자, "시프레(chypre)"라는 한 장르 전체의 뼈대입니다. 그런데 이름과 달리 오크모스는 이끼가 아닙니다. 이 페이지는 참나무에 붙어 자라는 이 신비한 생물이 어떻게 향료가 되는지를 따라갑니다. 오크모스가 향수 안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는 노트 페이지에서, 시프레의 역사는 역사 페이지에서, 향의 상징은 문화 페이지에서 다룹니다.
이끼가 아니라 지의류
오크모스는 프랑스어로 "무스 드 셴(mousse de chêne, 참나무 이끼)"이라 불리지만, 식물학적으로는 이끼가 아니라 지의류(lichen)입니다.1 지의류는 곰팡이(균류)와 광합성을 하는 조류(藻類)나 박테리아가 한 몸으로 사는 공생체입니다.2 향료로 쓰는 오크모스는 주로 참나무 껍질에 붙어 자라는 에베르니아 프루나스트리(Evernia prunastri)로, 사슴뿔처럼 갈라진 모양의 지의류입니다.2 비슷한 것으로 소나무·전나무 같은 침엽수에 붙는 "트리모스(treemoss, Evernia furfuracea)"가 있는데, 향과 성분이 조금 달라 구분됩니다.3 발칸반도(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와 중남부 유럽, 모로코 등지에서 채집됩니다.3
마르고 쉬어야 피어나는 향
오크모스의 가장 독특한 점은, 갓 딴 신선한 상태에서는 이렇다 할 향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1 채집한 지의류를 말리고 한동안 재워 두면, 비로소 바닷가와 나무껍질, 젖은 숲과 낙엽을 떠올리게 하는 특유의 향이 서서히 피어납니다.1 아주 적게 쓰면 젖은 숲 바닥 같은 깊이를 주지만, 지나치면 어둡고 눅눅해집니다. 밭이 아니라 "시간"이 오크모스의 향을 만드는 셈입니다.
콘크리트에서 앱솔루트로
오크모스는 물이나 수증기로 증류하지 않고, 용제(헥세인 등)로 추출합니다. 먼저 지의류를 용제에 담가 왁스질까지 함께 녹여 낸 "콘크리트(concrete)"를 얻고, 이를 다시 알코올로 정제해 향 성분만 담긴 "앱솔루트(absolute)"를 만듭니다.34 수율은 낮고, 얻어진 앱솔루트는 짙은 초록빛~갈색의 점성 있는 액체입니다.4 조향사 장클로드 엘레나의 원료 목록에도 "오크모스 앱솔루트"가 올라 있을 만큼, 이 앱솔루트는 오래도록 향수의 필수 재료였습니다.5
시프레의 뼈대
오크모스가 향료에서 특별한 것은, 하나의 향수 장르를 떠받치는 재료이기 때문입니다. 오크모스에 베르가못의 빛과 라브다넘(앰버)의 따뜻함을 엮으면 시프레(chypre) 어코드가 됩니다.6 한 평론가는 이 어코드의 오크모스를 "쓰고 잉크 같은 초록"이라 표현했는데,6 이 어둡고 마른 초록빛이 밝은 시트러스와 달콤한 앰버 사이에서 향에 깊이와 그늘을 줍니다. 오크모스는 향을 오래 붙잡아 주는 고정제 역할도 해서, 오래도록 시프레와 푸제르(고사리) 계열, 특히 남성 향의 든든한 바탕이 되었습니다.
흙내음 계열의 초록
오크모스는 향의 분류에서 "흙내음(earthy)" 계열에 속합니다. 한 조향서는 오크모스를 패출리·베티버·라브다넘·담배와 함께 이 계열로 묶습니다.7 조향에서는 오크모스에 베르가못·패출리·귤 같은 향을 엮어 "이끼 낀 시트러스 시프레" 어코드를 만드는데,8 이 조합이 고전 향수의 마르고 우아한 바탕을 이룹니다. 흙과 숲, 시트러스의 빛이 한 어코드 안에서 만나는 것이 오크모스의 매력입니다.
아트라놀 문제와 규제
오크모스의 현대사에는 규제가 큰 자리를 차지합니다. 오크모스 앱솔루트에는 아트라놀(atranol)과 클로로아트라놀(chloroatranol)이라는 페놀 계열 성분이 들어 있는데, 이들이 강한 피부 알레르겐(감작 물질)으로 밝혀졌습니다.910 이 때문에 국제향료협회(IFRA)와 유럽연합은 오크모스의 사용을 엄격히 제한했고, 오늘날 향수에는 아트라놀·클로로아트라놀을 크게 줄인 "저(低)아트라놀" 정제 오크모스가 주로 쓰입니다.10 한 평론가는 이 규제를 두고 "최근 IFRA 규제 가운데 가장 뼈아픈 것이 오크모스 제한이며, 이 재료가 대부분의 남성 향의 뼈대였다"고 적었습니다.11
에버닐 — 오크모스의 대역
천연 오크모스가 규제되면서, 조향은 합성 대역에 기대게 됐습니다. 대표가 에버닐(Evernyl, 메틸 아트라테)로, 천연 오크모스를 닮은 향을 내는 분자입니다. 이 합성 오크모스는 이미 1969년 파코 라반의 향수 칼랑드르(Calandre)에 쓰였을 만큼 역사가 깊습니다.12 오늘날 조향사들은 에버닐과 여러 우디 앰버 분자를 섞어 사라진 오크모스의 초록빛 깊이를 흉내 냅니다.11 참나무에 붙어 자라던 지의류의 향이, 이제는 상당 부분 실험실의 분자로 이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주
[1] Mandy Aftel, Essence & Alchemy, "The Calculus of Fixation". 오크모스(mousse de chêne)가 주로 참나무에 자라는 부드럽고 끈적한 짙은 초록빛 지의류 Evernia prunastri 이며, 갓 딴 상태에서는 향이 거의 없다가 말리고 재운 뒤 바닷가·나무껍질·숲·낙엽을 떠올리게 하는 향이 난다고 설명합니다.
[2] Ken Druse & Ellen Hoverkamp, The Scentual Garden, "Forest". 지의류가 곰팡이와 광합성 조류·박테리아의 공생체이며, 조향용 오크모스가 사슴뿔처럼 갈라진 "안틀러(antler)" 형이라고 설명합니다.
[3] Steffen Arctander, Perfume and Materials of Natural Origin, "Oakmoss"·"Treemoss". 오크모스가 발칸(옛 유고슬라비아)·중남부 유럽·모로코 등에서 채집되고 콘크리트·앱솔루트로 가공되며, 침엽수에 붙는 트리모스(Evernia furfuracea)와 구분된다고 설명합니다.
[4] A. J. Jouhar · W. A. Poucher, Poucher's Perfumes, Cosmetics and Soaps, Vol. 1, "Oakmoss Resinoid/Absolute". 오크모스를 용제로 추출해 콘크리트·레지노이드·앱솔루트를 얻으며 수율이 낮고 짙은 색의 점성 액체라는 점을 설명합니다.
[5] Jean-Claude Ellena, Perfume: The Alchemy of Scent, 조향 원료 목록. 조향사의 팔레트에 "오크모스 앱솔루트"가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6] Luca Turin & Tania Sanchez, Perfumes: The A-Z Guide, "What is a chypre?". 고전 시프레가 코티의 시프레에서 이어지며 오크모스·베르가못·라브다넘을 엮은 것으로, 오크모스가 "쓰고 잉크 같은 초록"을 준다고 설명합니다.
[7] Mandy Aftel, Fragrant. 오크모스를 패출리·베티버·라브다넘·담배와 함께 "흙내음(earthy)" 계열로 분류합니다.
[8] Leonard Payne, Perfume Accords, "Mossy-Citrusy Chypre Base Accord". 오크모스·베르가못·패출리·귤·라임·발삼전나무를 엮은 이끼 낀 시트러스 시프레 베이스 어코드를 정리합니다.
[9] Günther Ohloff 외, Scent and Chemistry: The Molecular World of Odors, "7.18 Oakmoss". 오크모스의 성분과 함께 아트라놀·클로로아트라놀이 피부 감작 물질이라는 점을 설명합니다.
[10] Charles Sell, The Chemistry of Fragrances: From Perfumer to Consumer, "10.5 Skin Sensitisation". 오크모스의 아트라놀·클로로아트라놀이 알레르겐으로 규제되어 저아트라놀 정제 오크모스가 쓰이게 된 맥락을 설명합니다.
[11] Luca Turin & Tania Sanchez, Perfumes: The Guide 2018. IFRA 규제 가운데 오크모스 제한이 가장 뼈아프며, 오크모스가 대부분의 남성 향의 뼈대였고 조향사들이 이를 우디 앰버로 대체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12] Lizzie Ostrom, Perfume: A Century of Scents, "Calandre"(Paco Rabanne, 1969). 천연 오크모스를 닮은 합성 성분 에버닐(메틸 아트라테)이 1969년 칼랑드르에 쓰였다는 점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