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 문화

검은 금이라 불린 블랙페퍼 — 후추의 문화

블랙페퍼(후추)가 문화에 남긴 자국 — '향신료의 왕'이라는 별명, 로마를 구한 후추 몸값, 파라오의 콧구멍에 담긴 후추알, 금처럼 쓰인 지불 수단과 버뮤다의 후추알 의식, 콜럼버스가 부른 이름의 혼동, 그리고 검정·백·녹·핑크의 여러 얼굴까지, 작은 검은 열매에 담긴 문화의 이야기를 정리합니다.

블랙 페퍼 향수 노트 일러스트

지금은 어느 식탁에나 놓인 흔한 양념이지만, 후추는 오랫동안 "검은 금"이라 불릴 만큼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그 작은 검은 알갱이에는 재산과 권력, 그리고 먼 세계를 향한 갈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페이지는 블랙페퍼가 문화에 남긴 자국을 정리합니다. 후추가 향료가 되는 과정은 원료 페이지에서, 후추 무역의 역사는 역사 페이지에서 다룹니다.

향신료의 왕

후추는 흔히 "향신료의 왕(King of Spices)"이라 불립니다. 수많은 향신료 가운데 후추가 이런 별명을 얻은 것은, 오랜 세월 무역과 요리에서 차지한 압도적인 비중 때문입니다. 고대부터 후추는 사프란·생강과 함께 향신료 무역의 핵심이었고, 그 수요는 로마에서 중세, 르네상스까지 식지 않았습니다.1 오늘날에도 후추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는 향신료로 꼽히며, "소금과 후추"는 어느 식탁에나 놓이는 가장 기본적인 짝이 되었습니다.2 강하고 오래 남는 향을 좋아한 옛사람들에게, 후추는 음식과 향의 세계 모두에서 빠질 수 없는 재료였습니다.

로마를 구한 후추 몸값

후추가 얼마나 값졌는지는 로마의 한 장면이 극적으로 보여 줍니다. 408년, 서고트의 왕 알라리크가 로마를 포위했을 때, 로마 시민들은 포위를 풀기 위해 막대한 몸값을 치렀습니다. 금 5,000파운드, 은 30,000파운드, 비단 튜닉 4,000벌과 함께 후추 3,000파운드가 그 목록에 들어 있었습니다.3 후추가 금·은과 나란히 국가의 몸값이 될 만큼 귀했던 것입니다. 로마인들이 후추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로마 요리책 《데 레 코퀴나리아》의 468개 요리 가운데 349개에 후추가 들어간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납니다.4

파라오의 콧구멍에 담긴 후추

후추의 값어치는 죽음의 의례에까지 닿았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만들 때 후추알을 방부와 향의 재료로 썼는데, 기원전 13세기의 파라오 람세스 2세의 미라에서는 콧구멍에 채워 넣은 검은 후추알이 발견되었습니다.5 왕의 육신을 영원히 보존하려는 의례에 후추가 쓰였다는 사실은, 이 향신료가 단순한 양념이 아니라 신성하고 값진 물건으로 여겨졌음을 보여 줍니다.

금처럼 쓰인 후추

후추의 가치는 별명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후추는 실제로 금처럼 교환의 수단이자 공물(貢物)로 쓰였습니다.6 다시 말해 후추는 돈이자 세금이자 예물이었습니다. 유럽 역사에는 집세나 세금을 후추로 냈다는 기록, 후추 한 줌이 큰 재산으로 여겨졌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영어에는 지금도 아주 적은 상징적인 임대료를 뜻하는 "peppercorn rent(후추알 임대료)"라는 표현이 남아 있는데, 이는 한때 후추알이 값진 지불 수단이었던 시절의 흔적입니다.7

버뮤다의 후추알 의식

이 "후추알 임대료"는 지금도 살아 있는 전통이 되었습니다. 대서양의 섬 버뮤다에서는 1816년 이래 매년 "후추알 의식(Peppercorn Ceremony)"이 열립니다. 옛 국사당(Old State House)을 프리메이슨이 빌려 쓰며 임대료로 후추알 한 알을 내기로 한 데서 시작된 이 의식에서는, 예포와 악대 속에 프리메이슨이 벨벳 방석 위에 놓은 후추알 한 알을 총독에게 정중히 바칩니다.8 한 알의 후추가 200년 넘게 이어지는 화려한 국가 의례가 된 것은, 후추가 지녔던 상징적 무게를 잘 보여 줍니다.

콜럼버스와 이름의 혼동

후추를 향한 갈망은 뜻밖의 이름을 낳기도 했습니다.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항해한 것도 후추와 향신료의 산지에 닿기 위해서였는데, 그가 아메리카에서 만난 것은 후추(Piper nigrum)가 아니라 매운 고추(캅시쿰)였습니다. 그럼에도 매운맛 때문에 이 새로운 식물에 "페퍼(pepper)"라는 이름이 붙었고, 그래서 오늘날 영어에서 전혀 다른 두 식물이 같은 "페퍼"라는 이름을 나눠 쓰게 되었습니다.9 후추를 찾다 고추를 만난 이 혼동은, 대항해 시대가 얼마나 후추에 이끌렸는지를 보여 주는 흔적입니다.

검정·백·녹, 그리고 핑크

우리가 아는 여러 색의 후추 가운데 검정·백·녹색 후추는 모두 같은 나무 Piper nigrum에서 나옵니다. 덜 익은 열매를 말리면 주름진 검은 후추, 익은 열매의 껍질을 벗기면 백후추, 어린 열매를 갈무리하면 녹색 후추가 됩니다.10 반면 화사한 색으로 향수와 요리에 자주 쓰이는 "핑크페퍼"는 사실 진짜 후추가 아니라 전혀 다른 나무(Schinus)의 열매로, 과일 같고 꽃 같은 향에 은은한 단맛을 지닙니다.11 같은 "후추"라는 이름 아래 이렇게 여러 얼굴이 담겨 있는 셈입니다.

세계를 움직인 작은 열매

후추를 향한 갈망은 단지 식탁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더 싸게, 더 많이 후추를 손에 넣으려는 열망은 유럽의 항해가들을 바다로 내몰았고, 대항해 시대를 여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습니다(자세한 이야기는 역사 페이지 참고). 오늘날 우리가 세계 지도라 부르는 것의 상당 부분은, 이 작은 검은 열매를 찾아 나선 항해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흔한 양념 하나가 제국과 무역, 그리고 세계사의 방향을 바꾼 셈입니다.

향에 담긴 후추

이런 문화적 무게는 향수 속 후추의 인상에도 스며 있습니다. 블랙페퍼는 향에 생기와 긴장감, 강단 있는 느낌을 더하는데, 여기에는 "귀하고 강렬한 향신료"라는 후추의 오랜 이미지가 겹쳐 있습니다. 옛사람들이 후추를 두고 "마음을 깨우고 무딘 감정을 데운다"고 여겼던 것처럼,12 향수 속 블랙페퍼도 밋밋한 향을 깨우고 또렷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조향사 맨디 애프텔은 후추 정유를 "매운맛의 방해 없이 후추의 향과 풍미를 온전히 느끼게 해 주는 발견"이라 표현하며, 은은한 꽃결이 도는 마다가스카르산을 골라 건조하고 우디한 후추 향과 어울렸다고 적었습니다. 와인처럼 후추에도 산지에 따른 '테루아'가 있다는 것입니다.13 화사한 핑크페퍼가 상큼한 생기를 더하는 것과 함께, 후추 계열은 향의 시작을 톡 쏘게 여는 재료로 사랑받습니다. 향수 안에서 후추가 어떤 향으로 감지되고 어떻게 쓰이는지는 노트 페이지에서 다룹니다.

[1] Mandy Aftel, Fragrant(향신료 무역 단원). 블랙페퍼가 사프란·생강과 함께 향신료 무역의 핵심이었고, 로마부터 중세와 르네상스까지 그 수요가 이어졌다고 설명합니다.

[2] New Lines Magazine, "A Story of Pepper, the World's Most Important and Underappreciated Spice." 후추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널리 거래되는 향신료로, 일상 식탁의 기본이 됐다는 점을 다룹니다. https://newlinesmag.com/essays/a-story-of-pepper-the-worlds-most-important-and-underappreciated-spice/

[3] "Sack of Rome (410)," Wikipedia. 408년 알라리크가 로마를 포위했을 때 로마가 금 5,000파운드·은 30,000파운드 등과 함께 후추 3,000파운드를 몸값으로 치렀다는 점을 정리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Sack_of_Rome_(410)

[4] The Old Foodie, "A peppercorn ransom." 후추가 로마에서 화폐처럼 쓰일 만큼 귀했고, 현존하는 유일한 로마 요리책 《데 레 코퀴나리아》의 468개 요리 중 349개에 후추가 들어간다는 점을 전합니다. http://www.theoldfoodie.com/2007/08/peppercorn-ransom.html

[5] Pioneer Thinking, "Of Empires and Nostrils: A History of Pepper." 고대 이집트가 미라 제작에 후추를 썼고, 기원전 13세기 파라오 람세스 2세의 미라 콧구멍에서 검은 후추알이 발견됐다는 점을 전합니다. https://pioneerthinking.com/of-empires-and-nostrils-a-history-of-pepper/

[6] Mandy Aftel, Fragrant(향료 단원). 블랙페퍼가 고대에 매우 귀하게 여겨져 금처럼 교환 수단이자 공물로 쓰였다고 설명합니다.

[7] "Peppercorn (law)," Wikipedia. 중세 잉글랜드에서 값비싼 사치품이던 후추알 한 알을 상징적 임대료로 받던 관습에서 "peppercorn rent"라는 표현이 유래했으며, 후추가 화폐처럼 통용될 만큼 귀했음을 전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Peppercorn_(law)

[8] Bermuda.com, "The Peppercorn Ceremony." 버뮤다에서 1816년 이래 매년 프리메이슨이 옛 국사당 임대료로 후추알 한 알을 총독에게 바치는 '후추알 의식'이 화려한 국가 의례로 이어진다는 점을 정리합니다. https://www.bermuda.com/the-peppercorn-ceremony/

[9] "Black pepper," Wikipedia. 콜럼버스가 후추를 찾아 항해했으나 아메리카에서 만난 캅시쿰(고추)에 매운맛 때문에 "페퍼"라는 이름이 붙어, 전혀 다른 두 식물이 같은 이름을 나눠 쓰게 됐다는 점을 정리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Black_pepper

[10] ChefShop, "Peppercorn Guide: Types, Origins, and How to Use Black, White, Green & Pink Pepper." 검정·백·녹색 후추가 모두 같은 나무 Piper nigrum에서 수확·가공 방식에 따라 나온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https://chefshop.com/blogs/news/peppercorn-guide-types-uses-origin

[11] Tasting Table, "9 Types Of Peppercorns And How To Use Them." 핑크페퍼가 진짜 후추가 아니라 다른 나무(Schinus)의 열매로, 과일 같고 꽃 같은 향에 은은한 단맛을 지닌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https://www.tastingtable.com/692156/peppercorns-different-types-black-pepper-green-pink/

[12] Mandy Aftel, Fragrant(향료 단원). 블랙페퍼가 마음을 자극하고 무딘 마음을 데운다고 여겨졌다는 옛 인식을 전합니다.

[13] Mandy Aftel, Fragrant(블랙페퍼 정유 단원). 후추 정유가 매운맛의 방해 없이 후추의 향을 온전히 전하는 재료이며, 은은한 꽃결이 도는 마다가스카르산을 골랐고 후추에도 와인 같은 '테루아'가 있다고 적은 대목을 전합니다.

블랙페퍼를 더 깊게 읽기

향수 역사후추를 향한 항해 — 블랙페퍼가 지나온 길블랙페퍼(후추)가 지나온 역사 — 고대 그리스·로마의 금값 향신료, 무지리스와 몬순의 바닷길, 플리니우스가 한탄한 로마의 금 유출, 잊힌 라이벌 롱페퍼, 아랍과 베네치아의 독점, 대항해 시대와 포르투갈의 독점, 그리고 오늘날 베트남까지 후추 무역의 흐름을 따라갑니다. 향 문화검은 금이라 불린 블랙페퍼 — 후추의 문화블랙페퍼(후추)가 문화에 남긴 자국 — '향신료의 왕'이라는 별명, 로마를 구한 후추 몸값, 파라오의 콧구멍에 담긴 후추알, 금처럼 쓰인 지불 수단과 버뮤다의 후추알 의식, 콜럼버스가 부른 이름의 혼동, 그리고 검정·백·녹·핑크의 여러 얼굴까지, 작은 검은 열매에 담긴 문화의 이야기를 정리합니다. 향 원료블랙페퍼는 어떻게 향이 되나 — 후추 열매에서 정유까지블랙페퍼(후추)가 어떻게 향료가 되는지 — 덜 익은 후추 열매의 증류, 매운맛을 내는 피페린과 향을 내는 휘발 성분의 차이, '페퍼리한' 향의 열쇠 로툰돈, 그리고 진짜 후추가 아닌 핑크페퍼까지 원료의 길을 따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