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의 후추와 향수의 블랙페퍼는 같은 열매에서 나오지만, 담고 있는 것이 조금 다릅니다. 후추의 얼얼한 매운맛과 알싸한 향 중에서, 향료가 가져오는 것은 "향"뿐입니다. 이 페이지는 후추가 어떻게 향료가 되는지를 정리합니다. 블랙페퍼가 향수 안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는 노트 페이지에서, 후추 무역의 역사는 역사 페이지와 문화 페이지에서 다룹니다.
후추나무의 열매
블랙페퍼는 인도 남부가 원산인 덩굴식물 후추나무(Piper nigrum)의 열매입니다.1 후추과(Piperaceae)에 속하는 이 식물은 열대의 다른 나무를 타고 올라가며 자라고, 작고 둥근 열매(핵과)가 송이로 열립니다.2 우리가 아는 "검은 후추(블랙페퍼)"는 이 열매를 아직 덜 익었을 때 따서 말린 것으로, 말리는 동안 겉껍질이 쭈글쭈글해지고 검게 변하면서 익숙한 검은 후추알이 됩니다.2
검정·백·녹 — 같은 나무의 여러 얼굴
우리가 아는 여러 색의 후추 가운데 검정·백·녹색 후추는 모두 같은 나무 Piper nigrum에서 나옵니다. 덜 익은 열매를 말리면 주름진 검은 후추, 익은 열매의 껍질을 벗기면 매끈한 백후추, 어린 열매를 갈무리하면 녹색 후추가 됩니다.3 향료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향이 가장 풍부한 검은 후추입니다.
향을 뽑는 방법 — 증류와 CO₂
향료로서의 블랙페퍼는 덜 익은 후추 열매를 말리고 부순 다음, 증기로 향 성분을 뽑아내는 수증기 증류(steam distillation)로 만듭니다.4 증류는 향신료의 향을 100배 이상 농축해 주지만, 그만큼 정유는 원료 향신료보다 훨씬 비쌉니다.4 이렇게 얻은 정유는 거의 투명하고, 향은 마르고 신선하며 나무처럼 은은하고 따뜻하게 알싸합니다. 세기가 매우 강해 조향에서도 아주 적은 양만 씁니다.4 증류 외에 이산화탄소로 뽑는 방식(CO₂ 추출)도 있는데, 이 경우 갓 갈아낸 후추에 더 가까운 생생한 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매운맛의 정체 — 피페린
후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점은, 매운맛과 향이 서로 다른 성분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혀를 얼얼하게 하는 매운맛은 피페린(piperine)이라는 알칼로이드에서 오는데, 이 성분은 무겁고 잘 증발하지 않아(비휘발성) 증류로 뽑은 향료에는 거의 담기지 않습니다.5 그래서 향수 속 후추는 맵지 않습니다. 피페린은 1819년 덴마크 화학자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가 후추에서 처음 분리했고, 상업용 후추에는 무게의 약 5~10%가 들어 있습니다.6
후추 향을 만드는 분자들
반대로 후추의 알싸한 "향"은 가벼워서 잘 증발하는 성분들이 만듭니다. 대표적으로 나무·꽃 같은 결의 베타-카리오필렌, 상큼한 리모넨, 소나무 같은 피넨 등이 후추 정유의 주요 성분입니다.7 그중 베타-카리오필렌은 정향·로즈메리 등에도 들어 있는 세스퀴테르펜으로, 후추 정유에 나무 같고 스파이시한 바탕을 더합니다.8 이런 휘발 성분들이 어우러져 후추 특유의 마르고 알싸한 향을 냅니다.
로툰돈 — '페퍼리한' 향의 열쇠
후추 향의 진짜 서명은 로툰돈(rotundone)이라는 세스퀴테르펜입니다. 2008년 연구로 규명된 이 성분은 후추알뿐 아니라 후추 향이 나는 시라즈(쉬라즈) 와인의 "블랙페퍼" 향까지 책임지는, 매우 강력한 향 분자입니다.9 물에서 8ng/L(리터당 나노그램) 수준의 극미량으로도 감지될 만큼 강력한데, 흥미롭게도 사람의 약 20%는 아무리 진해도 이 향을 맡지 못한다고 합니다.9 향수의 후추가 "맵다"기보다 "쨍하게 알싸하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이 로툰돈에 있습니다.
향의 세기와 조향에서의 소량 사용
블랙페퍼 정유는 향의 세기(odor intensity)가 매우 강한 재료입니다. 조향에서는 흑후추를 생강·정향·너트멕·카다멈과 함께 대표적인 "스파이시 톱 노트"로 다루는데,10 워낙 강해서 아주 적은 양으로도 향 전체의 첫인상을 좌우합니다. 요리에서 후추를 조금씩 넣듯, 조향사도 후추를 신중하게 소량만 씁니다.
진짜 후추가 아닌 핑크페퍼
향수에서 "핑크페퍼(분홍 후추, 프랑스어로 baies roses)"라는 이름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이것은 사실 후추나무와 관계가 없습니다. 핑크페퍼는 남미 원산의 쉬누스(Schinus) 나무 열매로, 후추과가 아니라 망고·캐슈넛과 같은 옻나무과(Anacardiaceae)에 속합니다.11 향은 블랙페퍼보다 더 밝고 톡 쏘며, 살짝 장미와 과일 같은 상큼한 결을 가집니다.12 그래서 현대 향수에서는 무거운 후추 대신 가볍고 화사한 스파이스가 필요할 때 핑크페퍼를 즐겨 씁니다. 같은 "페퍼"라는 이름을 쓰지만, 블랙페퍼와 핑크페퍼는 전혀 다른 식물이라는 점을 알아 두면 향을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향수에서의 쓰임
블랙페퍼는 향이 강하고 빨리 피어오르는 탑 노트로, 아주 적은 양으로도 향에 생기와 날카로움을 더합니다. 시트러스·꽃 향의 윤곽을 또렷하게 만들고, 우드·앰버 계열에 강단 있는 인상을 줍니다. 세기가 워낙 강해 조향사들은 신중하게 소량만 쓰지만, 그 작은 양이 향수 전체의 첫인상을 바꿔 놓습니다. 블랙페퍼가 다른 노트와 어떻게 어울리는지는 노트 페이지에서 다룹니다.
주
[1] Plants of the World Online(POWO), Kew. 후추나무(Piper nigrum L.)의 분류와 원산지(인도 남부) 정보. https://powo.science.kew.org/
[2] "Black pepper," Wikipedia. 후추나무가 후추과의 덩굴식물이며, 검은 후추가 덜 익은 열매(핵과)를 말려 겉껍질이 검게 주름진 것이라는 점을 정리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Black_pepper
[3] ChefShop, "Peppercorn Guide: Types, Origins, and How to Use Black, White, Green & Pink Pepper." 검정·백·녹색 후추가 모두 같은 나무 Piper nigrum에서 수확·가공 방식에 따라 나온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https://chefshop.com/blogs/news/peppercorn-guide-types-uses-origin
[4] Mandy Aftel, Fragrant(향료 단원). 향신료의 향을 수증기 증류로 100배 이상 농축해 거의 투명한 정유를 얻으며, 그만큼 정유가 원료보다 훨씬 비싸고 향이 강해 소량만 쓴다고 설명합니다.
[5] A. K. Takooree 외, "The pungency of black pepper," Clinical Phytoscience. 매운맛을 내는 알칼로이드 피페린(piperine)이 비휘발성이어서 증류 정유에는 거의 담기지 않는다는 점을 정리합니다. https://link.springer.com/article/10.1186/s40816-021-00292-2
[6] PubChem, "Piperine" (CID 638024). 피페린(C17H19NO3)이 1819년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에 의해 후추에서 처음 분리됐고 상업용 후추에 무게의 약 5~10%가 들어 있다는 점을 정리합니다. https://pubchem.ncbi.nlm.nih.gov/compound/Piperine
[7] "Chemical composition of black pepper (Piper nigrum) essential oil," PMC. 후추 정유의 주요 휘발 성분이 베타-카리오필렌·리모넨·알파/베타-피넨 등이라는 성분 분석을 정리합니다. https://pmc.ncbi.nlm.nih.gov/articles/PMC6930617/
[8] PubChem, "beta-Caryophyllene." 베타-카리오필렌이 정향·로즈메리 등에도 들어 있는 세스퀴테르펜으로 나무 같고 스파이시한 향을 낸다는 점을 정리합니다. https://pubchem.ncbi.nlm.nih.gov/compound/beta-Caryophyllene
[9] Wood 외, "From Wine to Pepper: Rotundone, an Obscure Sesquiterpene, Is a Potent Spicy Aroma Compound," J. Agric. Food Chem.(2008). 로툰돈이 후추알과 시라즈 와인의 '블랙페퍼' 향을 내는 매우 강력한 향 분자로, 물에서 약 8ng/L의 극미량으로도 감지되지만 사람의 약 20%는 이를 맡지 못한다는 점을 전합니다. https://pubmed.ncbi.nlm.nih.gov/18461961/
[10] Mandy Aftel, Essence & Alchemy(향 노트 분류 단원). 흑후추가 생강·정향·너트멕·카다멈 등과 함께 향의 세기가 강한 '스파이시 톱 노트'로 분류된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11] Fragrantica, "Pink Pepper" note. 핑크페퍼(baies roses)가 후추나무가 아니라 옻나무과(Anacardiaceae)의 쉬누스(Schinus) 나무 열매이며 블랙페퍼와 무관하다는 점을 정리합니다. https://www.fragrantica.com/notes/Pink-Pepper-91.html
[12] Tasting Table, "9 Types Of Peppercorns And How To Use Them." 핑크페퍼가 밝고 과일·꽃 같은 상큼한 결을 지녀 블랙페퍼와 다른 향을 낸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https://www.tastingtable.com/692156/peppercorns-different-types-black-pepper-green-pin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