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역사

리큐어에서 향수로 — 블랙커런트가 지나온 길

블랙커런트(카시스)가 지나온 역사 — 유럽과 아시아의 약용 베리에서 정원의 작물로, 부르고뉴의 카시스 리큐어로, 전쟁과 금지의 사연을 지나 현대 향수의 대표적인 과일 노트로 자리 잡기까지의 흐름을 따라갑니다.

블랙커런트 향수 노트 일러스트

블랙커런트는 후추나 계피처럼 먼 바다를 건너온 향신료는 아닙니다. 대신 유럽의 정원과 부엌에서 조용히 자리를 넓혀, 약용 베리에서 사랑받는 리큐어로, 그리고 마침내 현대 향수의 대표적인 과일 노트로 이어진 향입니다. 이 페이지는 블랙커런트가 지나온 길을 따라갑니다. 블랙커런트가 향료가 되는 과정은 원료 페이지에서, 블랙커런트에 얽힌 문화는 문화 페이지에서 다룹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약용 베리

블랙커런트(Ribes nigrum, 카시스)는 영국에서 불가리아에 이르는 유럽과 중북부 아시아의 온대 지역에 널리 자생하는 관목의 열매입니다.1 새콤달콤한 이 열매는 오래도록 식용과 약용으로 쓰였습니다. 재배 이전에는 야생 열매·잎을 채집해 약으로 썼는데, 열매와 잎은 이뇨·발한 작용이 있다고 여겨져 열병과 인후통, 결석과 부종 같은 증상에 두루 쓰였습니다.2 비타민이 풍부하고 향이 진해서, 블랙커런트는 일찍부터 몸에 좋은 베리로 여겨졌습니다.

정원으로 들어온 베리

블랙커런트가 본격적으로 재배된 것은 비교적 최근입니다. 11세기에 이미 러시아에서 재배된 기록이 있지만, 유럽에서의 순화(馴化)는 대체로 16세기 북프랑스·벨기에에서 시작되어 서북유럽의 정원으로 퍼졌고, 유럽의 본격적인 재배는 17세기 말에 이르러서였습니다.3 이 무렵 영국의 약초서들도 블랙커런트를 다뤘는데, 존 제라드의 방대한 약초서 《The Herball, or Generall Historie of Plantes》(1597)를 비롯한 17세기 문헌들이 커런트류의 약효를 기록했습니다.4 이렇게 블랙커런트는 오래도록 "먹고 치료하는 것"이었지, 아직 향수의 재료는 아니었습니다.

부르고뉴의 카시스 리큐어

블랙커런트의 위상을 바꾼 것은 리큐어였습니다. 1841년, 디종의 리큐어 제조업자 오귀스트드니 라구트(Auguste-Denis Lagoute)가 블랙커런트로 담근 달콤한 술 크렘 드 카시스(crème de cassis)를 처음 만들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5 이후 크렘 드 카시스는 부르고뉴(버건디)의 수도 디종을 대표하는 문화·산업 유산으로 자리 잡았고, 이 리큐어 산업이 커지면서 부르고뉴는 블랙커런트 재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지역은 훗날 향수용 카시스 새순의 최대 산지가 되는데(자세한 내용은 원료 페이지 참고), 리큐어를 위해 넓힌 블랙커런트 밭이 향료 산업으로도 이어진 셈입니다.

전쟁과 금지 — 나라마다 다른 길

블랙커런트의 근대사는 나라마다 크게 달랐습니다. 영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잠수함이 오렌지 수입을 막자, 정부가 비타민 C가 풍부한 블랙커런트 재배를 장려했고 리베나(Ribena) 시럽을 어린이에게 무료로 나눠 주었습니다.6 반대로 미국에서는 블랙커런트가 소나무에 해를 끼치는 병(백송 수포녹병)을 옮긴다는 이유로 1911년부터 재배가 연방 차원에서 금지되어, 오랫동안 낯선 과일로 남았습니다(자세한 이야기는 문화 페이지 참고).7 같은 베리가 한쪽에서는 국가가 권하는 건강식품이, 다른 쪽에서는 금지된 작물이 된 셈입니다.

향수의 과일 노트로

블랙커런트가 향수의 재료로 본격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20세기 후반의 일입니다. 향수에서 "블랙커런트(카시스)"는 두 가지를 가리킵니다. 하나는 테아스피란(theaspirane) 계열로 만든 합성 베리 노트로, 장뇌(캄포)를 띤 붉은 과일 향을 내고, 다른 하나는 꽃봉오리에서 얻은 천연 추출물로 날카롭고 푸르며 유황 같은 향 — 흔히 "고양이 오줌"이라 묘사되는 향 — 을 지닙니다.8 밝고 달콤하기만 한 기존 과일 향과 달리, 블랙커런트는 향에 어두운 깊이와 톡 쏘는 긴장감을 줄 수 있었기에 조향사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카시스 부드 — 고양이 오줌 같은 향

천연 카시스 새순(부드) 정유의 향은 특히 강렬하고 복잡합니다. 향 평론가 루카 투린은 이 향이 "기대되는 프루티한 카시스, 밝은 풀 벤 듯한 초록, 조향사들이 '고양이 오줌'이라 부르는 쉭쉭한 암모니아 같은 뉘앙스, 그리고 틀림없는 유황 냄새"를 한데 끌어모은다고 표현했습니다.9 그래서 이 재료는 아주 소량만 써도 향에 놀라운 생기와 자연스러운 복잡함을 더합니다. 어둡고 새콤하며 살짝 야성적인 이 결이, 블랙커런트를 흔한 과일 향과 구별 짓습니다.

장미와 짝을 이룬 카시스

블랙커런트는 특히 장미와 만나 빛을 냅니다. 짙은 초록빛이 도는 블랙커런트-장미 어코드는 장미를 흔한 감상에서 구해 내면서도 끈적한 잼처럼 흐르지 않게 잡아 주는데, 이런 "정원과 부엌 사이"의 조합이 프루티 플로럴이라는 흐름의 중요한 재료가 되었습니다.10 이후 블랙커런트는 수많은 향수에서 과일 향의 세련된 얼굴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오늘날 블랙커런트는 전 세계에서 재배되며, 유럽이 전체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러시아가 생산량 자체로는 가장 많지만 대부분 자국 시장에서 소비되고, 세계 시장에서는 폴란드가 유럽연합 최대이자 세계 2위 생산국으로 꼽힙니다.11 러시아·폴란드에 이어 우크라이나·영국·프랑스 등이 주요 산지입니다.12 유럽의 정원에서 자라던 새콤한 베리가 리큐어를 거쳐 향수의 세련된 노트가 된 것은, 하나의 식물이 문화 속에서 어떻게 자리를 넓혀 가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향수에서 블랙커런트가 어떤 향으로 쓰이는지는 노트 페이지에서 다룹니다.

[1] "Blackcurrant," Wikipedia. 블랙커런트(Ribes nigrum)가 영국에서 불가리아에 이르는 유럽과 중북부 아시아 온대 지역에 자생하는 관목이라는 점을 정리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Blackcurrant

[2] "Food as Medicine: Black Currant (Ribes nigrum)," HerbalGram. 블랙커런트의 열매·잎이 이뇨·발한 작용이 있다고 여겨져 열병·인후통·결석·부종 등에 약으로 쓰였다는 점을 정리합니다. https://www.herbalgram.org/resources/herbalegram/volumes/volume-18/issue-10-october/news-and-features-2/food-as-medicine-black-currant/

[3] "Blackcurrant," Wikipedia. 11세기 러시아 재배 기록이 있고, 유럽의 순화는 16세기 북프랑스·벨기에에서 시작되어 17세기 말 본격 재배로 이어졌다는 점을 정리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Blackcurrant

[4] "John Gerard," Encyclopaedia Britannica. 존 제라드의 약초서 《The Herball, or Generall Historie of Plantes》(1597)가 17세기 영국에서 널리 읽힌 원예·약초서였다는 점을 정리합니다.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John-Gerard

[5] "Crème de cassis," Wikipedia. 1841년 디종의 리큐어 제조업자 오귀스트드니 라구트가 최초의 크렘 드 카시스를 만들었고, 이 술이 디종을 대표하는 문화·산업 유산이 되었다는 점을 정리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Cr%C3%A8me_de_cassis

[6] "Ribena," Wikipedia.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정부가 비타민 C가 풍부한 블랙커런트 재배를 장려하고 리베나 시럽을 어린이에게 무료로 배급했다는 점을 정리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Ribena

[7] "Blackcurrant production in the United States," Wikipedia. 백송 수포녹병 매개 우려로 미국에서 1911년부터 블랙커런트 재배가 연방 차원에서 금지됐다는 점을 정리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Blackcurrant_production_in_the_United_States

[8] Luca Turin & Tania Sanchez, Perfumes: The Guide 2018(용어 해설). "블랙커런트(카시스)"가 테아스피란 계열의 합성 베리 노트(장뇌를 띤 붉은 과일 향)이거나, 날카롭고 푸르며 유황 같은 "고양이 오줌" 향을 지닌 꽃봉오리 천연 추출물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9] Luca Turin & Tania Sanchez, Perfumes: The A-Z Guide(Roseberry 항목). 천연 블랙커런트 새순 정유가 프루티한 카시스, 밝은 풀 같은 초록, '고양이 오줌' 같은 암모니아 뉘앙스, 유황 냄새를 한데 지닌 강렬하고 복잡한 향이라고 설명합니다.

[10] Luca Turin & Tania Sanchez, Perfumes: The Guide 2018(Rosa Ribes 항목). 짙은 초록빛의 블랙커런트-장미 어코드가 "정원과 부엌 사이"에서 장미를 살리면서 잼처럼 흐르지 않게 잡아 준다고 평한 대목을 전합니다.

[11] The First News, "Poland biggest producer of blackcurrants in EU." 러시아가 생산량은 가장 많지만 주로 자국 소비에 그치고, 폴란드가 유럽연합 최대이자 세계 2위 블랙커런트 생산국이라는 점을 정리합니다. https://www.thefirstnews.com/article/poland-biggest-producer-of-blackcurrants-in-eu-6837

[12] Frutas & Hortalizas, "Black currant — Origin and production." 러시아·폴란드에 이어 우크라이나·영국·프랑스 등이 주요 블랙커런트 산지라는 점을 정리합니다. https://www.frutas-hortalizas.com/Fruits/Origin-production-Black-currant.html

블랙커런트를 더 깊게 읽기

향수 역사리큐어에서 향수로 — 블랙커런트가 지나온 길블랙커런트(카시스)가 지나온 역사 — 유럽과 아시아의 약용 베리에서 정원의 작물로, 부르고뉴의 카시스 리큐어로, 전쟁과 금지의 사연을 지나 현대 향수의 대표적인 과일 노트로 자리 잡기까지의 흐름을 따라갑니다. 향 문화카시스와 키르 — 블랙커런트의 문화블랙커런트(카시스)가 문화에 남긴 자국 — 부르고뉴의 카시스 리큐어와 시장의 이름을 단 키르, 유럽 시장을 바꾼 '카시스 드 디종' 판례, 전시 영국의 비타민 음료, 와인 잔 속의 카시스와 '고양이 오줌' 노트, 그리고 이름에 얽힌 코린트 건포도의 사연까지, 검은 베리에 담긴 문화의 이야기를 정리합니다. 향 원료블랙커런트는 어떻게 향이 되나 — 열매가 아니라 새순블랙커런트(카시스)가 어떻게 향료가 되는지 — 열매가 아니라 새순에서 뽑는 앱솔루트, 톡 쏘는 유황 싸이올의 비밀, 천연과 합성 카시스 베이스, 그리고 아주 적은 양으로 쓰는 이유까지 원료의 길을 따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