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의 향수사는 다른 어떤 노트와도 다른 이상한 출발을 가집니다. 자스민이 그라스의 꽃밭에서, 로즈가 불가리아의 계곡에서, 시트러스가 시칠리아의 정원에서 시작된 반면, 페어의 역사는 19세기 후반 유럽 어느 감자 알코올 공장의 부산물에서 시작됐습니다. 이 이상한 뿌리가 자라나 오늘의 프루티 향수와 구르망 향수의 부드러운 심장이 되었습니다. 이 페이지는 그 이상한 여정을 따라갑니다. 페어가 어떻게 향료가 되는지는 원료 페이지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 안 배의 오랜 자리는 문화 페이지에서 다룹니다.
19세기 후반 — 화학이 그린 첫 페어
19세기 후반은 유럽 향료 산업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던 순간이었습니다. 산업 혁명이 화학을 향료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오면서, 그 이전까지 자연에서만 얻을 수 있었던 향의 결들이 하나씩 실험실 안에서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흐름 안에서 페어 에테르(pear ether) 라는 이름의 새 재료가 등장합니다.1 이 재료는 감자에서 알코올을 만드는 공정의 부산물인 아밀 알코올을 정밀하게 산화시켜 얻은 액체였고, 놀랍도록 "좋은 배 향"을 냈습니다. 이 순간이 향수의 페어의 역사가 시작된 지점입니다. 페어는 처음부터 자연의 배가 아니라 산업의 부산물에서 태어났고, 그 이후 100년이 넘도록 이 이상한 계보 위에서 자라났습니다.
향수와 식품, 그리고 사탕의 공유 재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페어 에테르는 향수업뿐 아니라 식품과 사탕 산업에도 광범위하게 사용됐습니다. 유럽의 캔디 공장에서 이 분자는 "배 향 사탕"과 "바나나 향 사탕"의 공통 재료였고(같은 분자가 두 과일 향으로 다르게 인식되는 흥미로운 지점), 리큐어와 시럽에도 향의 첨가제로 얹혔습니다. 향수업은 이 시기에 페어 에테르를 주로 비누와 오 드 콜로뉴의 보조 재료로 사용했습니다. 강한 향의 주역은 아니었지만, 향의 첫 인상에 부드러운 광택을 더하는 역할이었습니다. 이 시기 페어는 이미 "어디에나 있는 조용한 단맛"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20세기 중반 — 합성 화학의 정밀함
20세기 중반이 되면서 향료 화학은 새로운 정밀함을 얻습니다. 크로마토그래피 같은 분석 기술이 발전하면서 향분자의 구조를 정확히 이해하고 새 분자를 예측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그 흐름 안에서 페어 톤을 만드는 여러 분자들이 하나씩 밝혀지고 합성되었습니다.2 헥실 아세테이트, 프룩톤, 에틸 (2E,4E)-데카-2,4-디에노에이트("페어 에스터") 같은 분자들이 조향사의 팔레트에 들어오면서, 향수의 페어는 이제 하나의 이소아밀 아세테이트가 아니라 여러 분자의 세심한 조합으로 표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페어는 여전히 향수의 조연이었지만, 표현의 폭은 크게 넓어졌습니다.
1998년 — 쁘띠 셰리, 페어를 향수의 주인공으로
페어가 향수의 주인공 자리로 올라선 결정적 순간은 20세기 말에 왔습니다. 1998년 안니크 구탈(Annick Goutal)의 쁘띠 셰리(Petite Chérie) 는 페어 노트가 향수 한 편의 정체성을 정의한 첫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3 안니크 구탈이 딸 카미유를 위해 만들었다고 알려진 이 향수는 페어와 복숭아, 로즈와 뮤게, 그리고 부드러운 머스크가 어우러진 결로 "젊은 여성을 위한 우아한 프루티 플로럴"이라는 새로운 감각을 열었습니다. 한 평론가는 이 향수의 페어 노트를 "펑키한 페어(funky pear)"라 부르며, 그것이 이 향수의 매력적인 지문이 된다고 평했습니다. 쁘띠 셰리 이후 페어는 더 이상 조용한 조연이 아니라, 향수 한 편의 이름표가 될 수 있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안니크 구탈의 페어 계보
같은 안니크 구탈 하우스에서 페어 노트를 중심에 둔 여러 작품이 이어졌습니다. 세 수아르 우 자메(Ce Soir ou Jamais) 는 페어와 로즈를 결합한 "페어 로즈" 어코드의 대표 사례로 자주 인용되고, 이 조합이 이후 다른 브랜드의 페어 향수들에도 영감을 주었습니다.4 한 평론가는 세 수아르 우 자메의 페어-로즈 결을 "하룻밤 둔 화이트 와인 같은 분위기"라 다소 냉정하게 평하기도 했는데, 이 표현은 페어 노트가 지닐 수 있는 "약간 발효된 결"의 위험을 잘 보여 줍니다. 페어의 매력과 위험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사실을, 이 평이 조용히 알려 줍니다.
2000년대 — 프루티 플로럴의 확산
2000년대 향수 시장은 프루티 플로럴 향수의 폭발적 확산의 시대였습니다. 랑콤, 마크 제이콥스, 랄프 로렌, DKNY 등 여러 브랜드가 페어·복숭아·라즈베리·자몽을 자스민·로즈·튜베로즈와 결합한 프루티 플로럴 향수를 쏟아 냈고, 그중 상당수가 페어를 톱 노트의 밝은 광택으로 사용했습니다. 이 시기 페어는 "젊은 여성을 위한 데일리 향"의 상징적 노트 중 하나가 되었고, 세제와 바디 케어, 룸 스프레이까지 넓은 소비 시장으로 확산됐습니다.
2014년 — 블랙 오피움과 어두운 페어
21세기 페어의 방향을 크게 바꾼 작품이 2014년 이브 생 로랑의 블랙 오피움(Black Opium) 입니다.5 조향 나탈리 로르손, 마리 살라마뉴, 올리비에 크레습, 오노린 블랑이 함께한 이 향수는 페어의 밝은 결을 그대로 남겨 두되, 그 아래에 커피의 어두운 쓴맛과 바닐라의 진한 단맛, 그리고 자스민 삼박의 관능적 결을 얹었습니다. 결과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페어의 얼굴이었습니다. 밝고 여성적이었던 이 노트가 어둡고 관능적이며 어른스러운 결로 확장된 것입니다. 블랙 오피움은 크게 성공했고, 이후 페어를 어두운 방향으로 다루는 흐름 — "다크 프루티" 또는 "그레이 프루티" — 이 향수 시장 안에 자리잡았습니다.
2017년 — 구찌 블룸의 자스민 옆 페어
2017년 구찌 블룸(Gucci Bloom, 조향 알베르토 모릴라스) 은 이 흐름을 조금 다른 방향에서 이어 갔습니다.6 이 향수는 튜베로즈와 자스민 삼박의 관능적인 흰꽃을 중심에 두고, 그 옆에 페어의 그린한 결과 랑군 크리퍼(Rangoon Creeper)라는 새로운 꽃 노트를 얹었습니다. 여기서 페어는 어두운 결이 아니라 "관능적인 흰꽃의 옆에 서 있는 신선한 그린-프루티"의 자리였고, 이 자리는 페어가 봄과 여름의 밝은 감각뿐 아니라 성숙한 어른의 관능적 결과도 잘 어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21세기 니치의 재해석
21세기 니치 향수 흐름 안에서 페어는 계속해서 새로운 얼굴을 얻고 있습니다. 조 말론의 잉글리시 페어 앤 프리지아(English Pear & Freesia, 2010) 는 페어를 프리지아와 결합해 "영국 정원의 가을 오후" 같은 우아한 결을 만들었고, 이후 같은 브랜드가 페어를 다양한 방향으로 변주해 왔습니다. 프레데릭 말과 바이레도, DS & Durga 같은 니치 브랜드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페어를 재해석하며, 이 노트가 여전히 조향사에게 매력적인 도구로 남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아시아 시장과 페어
한국·중국·일본의 아시아 시장에서 페어는 "배(梨)"라는 매우 친숙한 이름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리잡았습니다. 다만 향수 라벨의 페어가 유럽 페어(Pyrus communis)인지 아시아 배(Pyrus pyrifolia)인지는 대개 명시되지 않고, 그 두 결의 차이는 향수 마케팅 안에서 무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시아 소비자에게 "페어 향수"는 대개 자신의 유년의 배 껍질 향과 서양 향수업의 세련된 페어 어코드가 겹쳐지는 경험이 됩니다.
150년의 조용한 여정
페어의 향수사는 150년의 조용한 여정입니다. 19세기 감자 알코올 공장의 부산물에서 시작해, 20세기 합성 화학의 정밀함을 얻고, 20세기 말 쁘띠 셰리에서 향수의 주역이 되었으며, 21세기 블랙 오피움과 구찌 블룸에서 어두움과 관능의 새로운 결을 얻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향수병을 열 때 만나는 그 아삭한 페어의 첫 인상 뒤에는, 이렇게 이상하고 흥미로운 150년의 이야기가 함께 있습니다.
주
[1] George William Askinson, Perfumes and Their Preparation, "Pear Ether" 단원. 19세기 후반 감자 알코올 공정의 부산물인 아밀 알코올을 정밀하게 산화시켜 얻은 페어 에테르가 향수업 안의 페어 노트의 뿌리이며, 이 시점부터 페어가 자연의 배가 아니라 산업 부산물의 화학적 가공에서 시작된 이상한 계보 위에 서 있다는 향수사적 출발점을 정리합니다.
[2] Günther Ohloff, Wilhelm Pickenhagen, Philip Kraft, Scent and Chemistry: The Molecular World of Odors, 20세기 향료 화학사 단원. 20세기 중반 크로마토그래피 같은 분석 기술의 발전과 함께 헥실 아세테이트·프룩톤·에틸 데카디에노에이트 같은 페어 톤 분자들이 하나씩 밝혀지고 합성되어, 조향사의 팔레트가 이소아밀 아세테이트 하나에서 여러 분자의 조합으로 확장된 흐름을 정리합니다.
[3] Luca Turin & Tania Sanchez, Perfumes: The A-Z Guide, "Petite Chérie (Annick Goutal)" 단원. 1998년 안니크 구탈이 딸 카미유를 위해 만들었다고 알려진 쁘띠 셰리가 페어와 복숭아·로즈·뮤게·머스크의 어코드로 "젊은 여성을 위한 우아한 프루티 플로럴"의 새로운 감각을 열었고, "펑키한 페어(funky pear)"라는 별명과 함께 페어 노트를 향수의 주인공 자리로 처음 올려 놓은 대표작이라는 평가를 정리합니다.
[4] 같은 책, "Ce Soir ou Jamais (Annick Goutal)" 단원. 안니크 구탈이 쁘띠 셰리의 뒤를 이어 발표한 세 수아르 우 자메가 페어와 로즈를 결합한 "페어 로즈" 어코드의 대표 사례로 자주 인용되며, 이 결이 "하룻밤 둔 화이트 와인 같은 분위기"라 평가되는 페어 노트의 매력과 위험(약간 발효된 결의 위태로운 균형)의 지점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라는 평을 정리합니다.
[5] Luca Turin & Tania Sanchez, Perfumes: The A-Z Guide, "Black Opium (Yves Saint Laurent)" 단원 및 조향사 크레딧 자료. 2014년 나탈리 로르손·마리 살라마뉴·올리비에 크레습·오노린 블랑이 함께 조향한 블랙 오피움이 페어의 밝은 결 아래에 커피의 어두운 쓴맛과 바닐라의 진한 단맛, 자스민 삼박의 관능적 결을 얹어 페어 노트에 새로운 "어두운 관능"의 얼굴을 만들었고, 이후 "다크 프루티" 흐름이 향수 시장에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는 흐름을 정리합니다.
[6] 같은 자료, "Gucci Bloom (Alberto Morillas, 2017)" 단원. 알베르토 모릴라스가 조향한 구찌 블룸이 튜베로즈와 자스민 삼박의 관능적 흰꽃을 중심에 두고 페어의 그린한 결과 랑군 크리퍼라는 새로운 꽃 노트를 결합해, 페어가 어두운 결뿐 아니라 관능적 흰꽃의 옆에서 신선한 그린-프루티의 자리로도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 준 대표 사례가 되었다는 흐름을 정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