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역사

한 분자가 만든 포근함 — 캐시미어의 역사

회사만의 비밀 분자를 만들던 캡티브 향료의 시대, 1968년 존 홀이 빚은 캐시메란, 스포르·루루의 초기 사용과 1994년 캐시미어 미스트, 그리고 스킨 센트의 시대까지 — 향수의 '캐시미어'가 지나온 역사를 따라갑니다.

캐시미어 향수 노트 일러스트

향수의 "캐시미어"는 오래된 천연 향이 아니라, 20세기 후반 실험실에서 태어난 한 분자의 역사입니다. 이 이야기는 향료 회사들이 자기만의 분자를 만들기 시작한 흐름 속에서, 1968년 한 화학자가 "양모의 촉감 같은 향"을 빚어내고, 그 향이 하나의 이름이자 감각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 페이지는 그 역사를 따라갑니다. 캐시미어가 어떤 향료인지는 원료 페이지에서, 직물 캐시미어의 문화는 문화 페이지에서 다룹니다.

캡티브 분자의 시대

20세기 향수의 큰 변화 중 하나는, 향료 회사들이 오직 자기만 가진 향 분자 — 이른바 "캡티브(captive)" 분자를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값비싼 천연 원료를 대신하거나 자연에 없던 새 향을 만들어, 다른 회사가 흉내 낼 수 없는 무기로 삼은 것입니다. 20세기 말에는 아예 향 하나만 병에 담은 "안티퍼퓸"까지 등장했는데, 이소 이 슈퍼(Iso E Super)나 앰브록산 같은 단일 분자가 그 주인공이었습니다.1 게자 쇤(Geza Schoen)이 이소 이 슈퍼 하나만으로 만든 몰레큘 01(Molecule 01)처럼, 단일 합성 분자가 그 자체로 하나의 향수가 되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2 캐시메란도 바로 이 흐름 속에서, 세계적 향료회사 IFF가 만든 캡티브 분자로 태어났습니다.3

1968, 홀의 캐시메란

캐시미어라는 향의 출발점은 1968년입니다. IFF의 화학자 존 홀(John Hall)이 새로운 분자를 합성했는데, 그 목표는 "캐시미어 양모의 촉감 같은 느낌을 주는 머스크"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4 이렇게 태어난 분자가 캐시메란(Cashmeran)입니다. 자연에는 없는 이 향은 곧 비누·샴푸·데오도런트부터 고급 향수까지, 우리가 매일 쓰는 제품의 바탕으로 퍼져 나갔습니다.4 향을 "촉감"의 이름으로 부른다는 발상 자체가, 합성 향료가 열어젖힌 새로운 감각의 언어였습니다.

향수 속으로 — 초기의 캐시메란

캐시메란이 향수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80년대입니다. 파코 라반의 스포르(Sport, 1986), 카사렐의 루루(Lou Lou, 1987) 같은 향수가 초기에 캐시메란을 쓴 예로 자주 언급됩니다.5 이 시기 향수들은 아직 캐시메란을 "포근함의 대명사"로 앞세우기보다, 향에 부드러운 우디-머스크의 깊이를 더하는 재료로 썼습니다. 새 분자가 조향사들의 팔레트에 자리를 잡아 가던 시기였습니다.

"캐시미어"라는 이름의 향 — 캐시미어 미스트

"캐시미어"를 하나의 향 개념으로 대중에게 각인시킨 것은 1994년 도나 카란(Donna Karan)의 캐시미어 미스트(Cashmere Mist)였습니다.6 이 향수는 크림·바스·데오도런트 같은 바디케어 라인에서 출발해 상징적인 향수로 자라났고, "일상의 사치"로서의 향이라는 개념을 널리 퍼뜨렸습니다.6 2019년에는 프래그런스 파운데이션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했습니다.7 다만 흥미로운 점은, "캐시미어 미스트"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이 향수가 실제로 캐시메란 분자를 썼는지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엇갈린다는 사실입니다.8 분명한 것은, 이 향수가 "캐시미어=포근하고 살결 같은 향"이라는 감각을 대중의 언어로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스킨 센트의 시대

1990년대 이후 향수는 점점 "스킨 센트(skin scent)" — 향수를 뿌리지 않은 듯 살결에 녹아드는 포근한 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갓 마른 빨래 같은 깨끗함과 포근한 우디-머스크가 유행하면서,9 캐시메란은 이 감각의 핵심 재료가 되었습니다. 무겁지 않게 따뜻하고, 요란하지 않게 오래가는 이 분자는 스킨 센트 시대에 꼭 맞았습니다. 오늘날 캐시메란은 고급 향수와 생활용품 어디에나 깔린, 현대 향수의 "숨은 바탕"이 되었습니다.9

합성이 연 포근함

캐시메란의 역사는 "천연 대 합성"이라는 오래된 논쟁의 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20세기 초부터 합성 향료는 "가짜"라는 의심과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기대를 동시에 받아 왔습니다.10 캐시메란은 그 논쟁에 하나의 답을 보탰습니다 — 자연에 없던 분자가, 오히려 가장 자연스럽고 포근한 "살결의 향"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스웨터의 포근함을 떠올리게 하는 이 향이 실은 실험실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합성 향료가 현대 향수에 무엇을 주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이름이 된 감각

캐시미어의 역사는 "감각이 이름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만질 수 있는 부드러움 — 캐시미어 양모의 촉감이 하나의 향 분자가 되고, 그 향이 다시 "포근함"을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향수 속 캐시미어의 따뜻한 향을 맡을 때, 우리는 20세기 후반 향료 화학이 열어젖힌 이 새로운 감각의 역사를 함께 맡는 셈입니다.

[1] Lizzie Ostrom, Perfume: A Century of Scents, "A New Century". 20세기 말 향 하나만 담은 "안티퍼퓸"이 등장했고 이소 이 슈퍼·앰브록스(앰브록산) 같은 단일 분자가 그 주인공이었다는 점을 전합니다.

[2] Lizzie Ostrom, Perfume: A Century of Scents, "A New Century". 게자 쇤이 이소 이 슈퍼 하나만으로 만든 몰레큘 01처럼 단일 합성 분자가 그 자체로 하나의 향수가 되는 흐름을 전합니다.

[3] Luca Turin & Tania Sanchez, Perfumes: The Guide 2018, "Glossary". IFF가 세계 최대 향료 제조사의 하나라는 점 등 향료 산업의 구조를 설명합니다.

[4] Fragrantica·Perfume Shrine, "Cashmeran". 캐시메란이 1968년 IFF의 존 홀에 의해 합성되었고 "캐시미어 양모의 촉감 같은 머스크"를 목표로 했으며, 비누·샴푸·데오도런트부터 향수까지 널리 쓰인다는 점을 정리합니다. https://www.fragrantica.com/news/The-Allure-of-Cashmeran-14694.html

[5] Fragrantica·Perfume Shrine, "Cashmeran". 파코 라반 스포르(1986)와 카사렐 루루(1987)가 초기에 캐시메란을 쓴 향수로 자주 언급된다는 점을 정리합니다. http://perfumeshrine.blogspot.com/2012/06/perfumery-material-cashmeran-blonde.html

[6] Fragrantica·Basenotes, "Cashmere Mist"(Donna Karan, 1994). 캐시미어 미스트가 바디케어 라인에서 출발해 상징적 향수로 자라 "일상의 사치"로서의 향 개념을 퍼뜨렸다는 점을 정리합니다. https://www.fragrantica.com/perfume/Donna-Karan/Cashmere-Mist-Eau-de-Toilette-496.html

[7] The Fragrance Foundation, "Donna Karan Cashmere Mist". 캐시미어 미스트가 2019년 프래그런스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는 점을 정리합니다. https://fragrance.org/award/donna-karan-cashmere-mist/

[8] Fragrantica·Perfume Shrine, "Cashmeran"·"Cashmere Mist". 캐시미어 미스트가 실제로 캐시메란 분자를 썼는지에 대해 자료마다 엇갈린다는 점을 정리합니다. https://www.fragrantica.com/news/The-Allure-of-Cashmeran-14694.html

[9] Fragrantica, "Cashmeran" 및 Luca Turin & Tania Sanchez, Perfumes: The Guide 2018. 갓 마른 빨래 같은 포근한 우디-머스크 스킨 센트가 유행하며 캐시메란이 고급 향수·생활용품의 숨은 바탕이 되었다는 점을 정리합니다.

[10] Lizzie Ostrom, Perfume: A Century of Scents, "By L.T. Piver, 1900: The Artificial Perfume". 20세기 초부터 "천연 대 합성" 논쟁이 이어졌고 합성 향료가 의심과 기대를 동시에 받아 왔다는 점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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